이름 붙이기는 밖에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게 아닐까싶다.
"이게 뭘까?" "그건 사랑이야."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면 대체 네가 왜 그러겠어?"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게 바깥에서는 왜 그리 잘 보이는 걸까?
안에서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것들이 바깥에서는 어쩜 그렇게 단순명쾌한걸까?
가까워질수록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름이 없는 이상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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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식으로 '꼼꼼'한 관찰이 계속 이어진다.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글을 보는 것 같은데 초등학생이 보이는 그대로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한 것뿐이라니! 감탄하고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막상 하려고하니 잘 안된다. 꼼꼼하게 보고 또 본대로 쓴다는게 참 낯설다. 자기가 뭘 보고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구나 싶어 또 새롭다. 보이는대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집중력도 기억력도 필요한 작업이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려면 많이 해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EBS에서 하는 다큐 프로에서 '착각'에 대해서 다룬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실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쉽게 착각하고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나중에 당신이 이런 착각을 했습니다하고 알려주면 자신이 그런 착각을 했다는 것을 쉽사리 믿지 못하고 놀라는 모습이 나왔는데, 착각이란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이 착각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고 설레이고 낯선 것들을 만나게 된다. 그건 아마 착각을 눈치채게 해주기 때문인게 아닌가 싶다.
무언가 쓰고 싶은데 뭘 쓰고 싶은지 모를 때, 분명 도움이 되어줄 책이다.
덧. OS언니랑, YM님이 글쓰고 싶다고 하시던데 이 책 선물해드려야겠다~.
난이의 몸이 축날까 염려스러웠다. 제 언니 첫 기일이 오기도 전에 당한 또다른 상이었다. 죽음이 지나치게 흔했다. 생각하면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기는 했다. 생로병사에서 앞의 세 가닥을 아우르는 마지막 단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로병'만큼의 '사'는 당연했다. 그래도 그 죽음이 유독 난이만 총애하고 있었다. 차례로 죽어나간 이들의 목소리가 난이의 귀를 울릴 것이었다. 난이의 세상을 귀신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 달을 먹다, 김진규, 144쪽-
작가들은 어떻게 마음을 이렇게도 잘 갈무리 할 수 있을까? 신기하다.
머릿속 맘속을 휘젓고 다니는 온갖 단어들을 잡아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엮어내어 눈앞에 들이민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자 일흔 명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 사기열전 백이열전, 저: 사마천, 옮김: 김원중, p6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