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01

사진찍기 2017. 4. 15. 00:35

2017.04.01 by K

 

견딜 수 없는 봄이 가고

 미칠 것 같던 여름이 가고

어찌할 수 없는 가을이 가고

차가운 겨울이 갔다.

 

그리고 다시 봄이다.

AND

 "그렇게 떠난 건 미안하게 생각해. 아주 나갈 생각은 아니었어. 잠깐 바람 좀 쐬다 돌아갈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가 이어져 봤자 얼마나 이어지겠어. 남편은 돌아왔냐고? 아니, 그 사람은 완전히 떠났어. 그때 남편과는 이미 이혼 얘기가 오가고 있었거든.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 때문이었지. 어선을 타다 만난 외국 여자였어. 억장이 무너졌지......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는 남편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거든. 결혼을 하기 전에는 부모님께 의지했겠지. 그러니 땅과 하늘이 동시에 무너진 것 같았어. 여고생인 척 채팅을 한 건...... 나쁜 의도가 아니었어. 난 대화가 필요했을 뿐이야. 그런데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는 두려웠어. 부모와 배우자를 동시에 잃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호했으니까...... 아저씨와 함께 있어 행복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아저씨와 함께 있었을 때도, 아저씨가 내게 의지한 만큼 나도 아저씨한테 의지했을 거야. 아저씨 집에서 나와 길을 돌아다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매번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살기만 했던 건 아닐까."

 오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오렌지주스 위로 녹은 얼음이 투명한 층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나도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 그렇지만 그게 나와 닮아서는 아니야. 예전에 내가 나와 고양이가 닮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건 절대로 착각이었어. 나는 그저 제멋대로에 무언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어. 나는 고양이에 한참 못 미치는 인간이 틀림없었어. 고양이를 돌보며 느낀 점은, 그 애들이 제멋대로로 보이는 게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거야. 고양이들은 단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동물이었을 뿐이야. 고양이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이 있는 존재들이었어. 어떤 종류의 어떤 고양이라도 말이야. 나는 내가 고양이에게 끌렸던 이유를 알게 되었어. 그건 나보다 감정적으로 강한 누군가에게 끌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야. 난 그 동물을 더 깊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고 브리더가 되기로 결심했지. 그래서 내가 캐터리 코너에 있었던 거야. 그 캐터리에 유명한 브리더가 하나 있는데, 그 사람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됐거든. 그 사람은 진짜 브리더야. 아비시니안을 전문으로 하지만 모든 고양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기초해서 그 일을 하고 있으니까. 어쩌씬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브리더가 세상엔 많거든. 브리더인 척 속여 마구 번식시킨 고양이로 돈을 버는 사람들도 많고...... 물론 난 아직 견습생이지만 언젠가는 유능한 브리더가 되고 싶어."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이수진, 269쪽~271쪽-

AND

윤진명: 넌 내가 싫은거냐. 내 가난이 싫은거냐.

강이나 나래이션: 부러워서 싫어. 가난하고 괴팍하고 깡마르고 볼품도 없으면서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서 싫어. 질투나게 만들어서 싫어. 너처럼 되고 싶은데 너처럼 될 수 없으니까. 미워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냄새가 나는거야. 내 질투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

- 청춘시대 3회 중에서-

AND

달콤한숨.05

사진찍기 2016. 8. 11. 23:03

2010.03.07 by K

 

어떤 자세도 불편하고 뭘해도 어색하다

불을 끄고

바닥에 등을 대고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린다

눈을 감으니

 

좋다

AND

환상의 빛

글읽기 2016. 7. 26. 23:42

 다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유이치도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 다미오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아버지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이층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저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툇마루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유이치도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요.

-82쪽,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송태욱, 바다출판사-

AND

뿌리를 내린 나무

글읽기 2016. 6. 21. 01:43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작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고, 납득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면에 스며든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던 느낌... 자라던 줄기와 피어나던 색색의 꽃을 잊을 수 없다. 길을 거닐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상의 나무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가 키워 올린 나무였고 이미 뿌리를 내리고 선 나무였다.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았고, 예전과 달리 누가 누구와 헤어졌대, 누가 누구를 버랬대... 주변의 속삭임에도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은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명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그런 나무를 키워본 인간만이, 인생의 천문학적 손실과 이익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믿음엔 변함이 없다.

 

 변함없이

 

 현실에선 세일과 세일이 이어졌었다. 두어 차례의 반짝세일까지 겹쳐 다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느낌이었다. 날이 멀다 하고 일을 관두는 아이들이 속출했고, 때문에 지옥이라 불리던 지하 1층으로 지원을 나서는 일이 예사가 되었다. 정말 힘들군요. 힘들지. 어쩌다 마주친 요한과도 고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게 전부였다.

 

-157~158쪽,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예담-

AND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 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이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7쪽-

 

 

 토마시는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라고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렇다, 취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자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61쪽-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부 가벼움과 무거움, 저-밀란쿤데라, 역-이재룡

AND

글읽기 2016. 3. 19. 09:32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말자.

 

-설운 서른, 4쪽-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