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의 매력

글읽기 2015. 9. 14. 14:15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멋진 세계가 있으리라고 믿어요. 게다가 머릴러, 길모퉁이라는 것에도 마음이 끌려요. 길모퉁이란 그 앞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모르는데 매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초록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숲을 빠져나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반짝이는 햇빛이 있을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풍경이며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름다운 곳이 있을지도 모르고, 에움길이나 언덕 또는 골짜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 그린게이블즈의 빨강머리 앤 1권, 루시 M. 몽고메리, 김유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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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규칙

글읽기 2015. 7. 16. 00:13

 나는 컴퓨터를 강제로 종료시켰다.

 창밖에서는 아무도 없는 교차로를 빨간 신호등이 비추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다루미와 둘이서 빨간 신호등일 때 길을 건넜다.

 "너는 사막 한가운데에 신호등이 있어도 파란불이 켜질때까지 기다리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당당하게 신호를 무시하는 녀석을 내가 놀리자,

 "사막 한가운데에 신호등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일부러 그쪽으로 가서 건너는 인간도 있냐?"

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건널목에서 예의 바르게 신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빨간불일 때 건너는 데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절대로 차한테 피해를 주지 않을 것. 당연한 소리겠지만 빨간불에서 건너는 게 버르싱 되면 깜빡하기 쉬우니까 규칙으로 정해두고 명심해야 돼. 신호등이 없는 장소에서 길을 건널 때 이상으로 차에 신경을 쓸 것. 멀리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도 그쪽 처지에서는 파란불인데 전방에 사람이 건너가고 있으면 불쾌하겠지. 조심하느라고 속도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원래 같으면 지나갈 수 있었던 신호에 걸릴지도 모르잖아."

 "또 하나는?"

 "아이들이 있을 때는 꼭 신호를 지켜야 한다는 것. 부모가 애써서 '빨간불에서는 서고 파란불에는 건너' 하고 가르쳐준게 다 허사가 되잖아."

 "그건 기만 아니야?"

 "기만이라기보다는 이중규칙이지. 아이들은 시야가 좁아.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어른만큼 넓은 범위를 보지 못하는 모양이야. 게다가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기면 다른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임기응변할 수 있는 판단력도 아직 다 키우지 못했고. 그러니까 우선은 신호를 지키는 단순한 방법으로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돼. 괜찮아, 이중규칙이라도. 사실은 어른들이 스스로 판단한 다음 신호를 무시하고 있다는 걸 간파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그 애들이 신호를 무시해도 괜찮은 거야. 그런 졸업시험에 통과하게 될 때까지는 아이들을 잘 속이고 싶어."

 물론 이 규칙은 다루미가 멋대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다루미는 이런 식으로 어떤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 판단의 기저에는 언제나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 가타부츠 중 '무언의 전화', 사와무라 린, 김소영, 277쪽~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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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은 금(金)이기도 하고 또 금이기도 했다. 침묵이 값진 금으로 비유되는 것이야 만고의 진리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으니 침묵은 흉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어려서 또래들과 사방치기를 할 때의 규칙은 엄정했다. 돌을 제자리에 차넣지 못하거나, 돌이 금 위에 얹어지거나, 놀이자의 발이 금을 밟으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에 목숨이 걸려 있었다. 그때의 금은 생사를 가르는 경계였고 틈이었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희생으로 거룩하게 포장했대도 어리석은 침묵은 보이지 않는 금 긋기에 불과했고, 그 금 위에서 숱한 마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제가 하는 말을 죽은 향이가 들을 수 있겠느냐고 여문이 물어왔을 때, 나는 차라리 너털너털 웃고 싶었다. 향이를 헤살놓지 않으려고 제속을 썩여가며 줄곧 유지했던, 천금같이 귀한 여문의 침묵은 향이가 밟고 죽을 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새삼 귀신에게랴.

 

 장삼을 입은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속내를 들을 자격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결코 동의한 적이 없는데도 제 임의로 권리를 부여해놓고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진해 내 앞에서 무너졌다. 그것이 무릎 꿇은 자백이든, 눈물로 버무린 고백이든, 아님 무장해제된 찰나의 실언이든, 그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네들은 내 앞에서 솔직해지고 싶어했다. 별다르게 작정하거나 마음먹은 것 없이도 저절로 그래지는 순수함에 나는 매번 놀라곤 했다.

 돌아서는 그들에게서 후회의 심정을 읽기도 했다. 어쩌자고 나를 이리도 드러내고 말았는가, 하는 자책으로 기가 꺾인 눈빛을 바라볼때마다 내가 가진 권리가 지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신뢰했다. 내 귀로 들어온 말이 적어도 내 입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무엇보다 곤혹스러운 경우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둘 이상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해야 할 때였다. 안타깝게도 언제나 상반된 사실이 충돌했다. 유일한 진실이란 없었다.

-달을 먹다, 김진규, 216,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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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패러독스

글읽기 2014. 4. 18. 08:26

 우리가 현실에서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은 '선택할 옵션이 많을 때'이다. 여기에 '맥시마이저 성향'을 추구하는 심리까지 가세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맥시마이저 성향'이란 자기 선택에서 최대의 효용과 최대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심리 상태이다. 이런 심리 상태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작 어떤 선택을 한 후에도 불만을 가진다. 여전히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민이 많다. '최고'라는 외부의 인정이 있기 전에는 여전히 불안해 하면서 불만을 가지는 상태이다. 한국 사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이다.

 

 요즘은 내가 누구를 선택할 때 이 남자(여자)가 '내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이상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확신하기를 소망한다. 그 사람이 아닌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결혼 잘못한 거 아냐?', 혹은 '이 남자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었던 거 아닐까?' 하는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혼하려는 사람은 누구든 결혼을 단순화시키고, 단순한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 선택의 문제에 처한 모든 사람이 꼭 알아야 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다양한 옵션은 멋진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짝, 사랑, 황상민,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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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자격이 없다는 말,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사실 그건 거짓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다른 이러저러한 동기가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한것이다, 뭐 그런 말들 말이야." (중략)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난 너무 신기해. 그렇게까지 안해도 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너무 깊이 분석하는 건 좋지 않아."

-모방범3, 미야베 미유키, 275~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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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집

글읽기 2013. 3. 5. 00:05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 요약하면 한 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순결하게 닦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라고 딱, 죽비를 내리치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집 -박규리

 

눈보라 속 혹한에 떠는 반달이가 안쓰러워

스님 목도리 목에 둘러주고 방에 들어와도

문풍지 웅웅 떠는 바람소리에 또 가슴이 아파

거적때기 씌운 작은 집 살며시 들춰보니

제가 기른 고양이 네 마리 다 들여놓고

저는 겨우 머리만 처박고 떨며 잔다

이 세상 외로운 목숨들은 넝마의 집마저 나누어 잠드는구나

오체투지 한껏 웅크린 꼬리 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소복하다

 

 무엇을 덧붙이겠습니까.

 추위에 떠는 개 반달이가 안쓰러워 목도리를 벗어 둘러주는 스님도, 어린 고양이들을 제 집에 먼저 들여놓고는 저는 겨우 머리만 처박은 채 눈을 맞고 있는 개도 과연 성자(聖者)라 할 만합니다. 이런 시를 만나는 순간 누구나 성자의 마음이 되어 가슴에 손을 얹게 되지요. 나는 누구와 무엇을 나눈 적이 있는가. 누구의 고통을 덜어 준 적이 있는가.

 시는 나와 세상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리하여 위로와 이해, 용서, 나눔의 마음을 일깨우며,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시에 담겨 있는 이런 마음을 시심(詩心)이라 합니다. 진정 시심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기와 탐욕을 꿈꾸지 않지요.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이웃과 세상에 손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 안 읽고도 여태껏 잘만 살았다."며 코 후비던 친구의 말은 빈말이기 쉽습니다.

 친구들도 그랬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천사의 마음, 즉 시심을 지니고 있어요. 푸른 하늘에 감동하고 죽은 벌레 때문에 눈물짓습니다. 할머니 주름살도 슬프고, 비 맞는 새를 보고도 가슴 아파합니다.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지식과 교양을 배우고 익혔음에도 갈수록 도덕적으로는 '타락'해 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속임수에 능란하고 아무 데나 침과 가래를 턱턱 뱉기도 하며, 말의 절반을 욕으로 채우고, 지하철에서 서 있는 할머니 앞에 앉아 조는 척도 잘하지요. 나 살자고 친구 따돌려 왕따 만들고, 때로는 방관하며, 싸움이 생기면 더 열심히 싸우라고 박수 치고 응원하며 핸드폰으로 찍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무섭고 살벌해졌나요? 시심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눈물이 왜 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봐!, 이상대, 104~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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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지간이라는 것은 마치 연애하는 남녀 사이만큼이나 복잡 미묘했고, 관계 또한 수평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남녀 사이에도 더 좋아하는 사람과 덜 좋아하는 사람 간에 권력관계가 형성되듯이, (당연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고 덜 좋아하는 사람이 강자가 되겠죠) 친구끼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장 친하다고 여기고 있는 친구와 나와의 관계가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수평적인 사이라면 나는 친구의 태도에 부당함을 느꼈을 때 정당히 어필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 관계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죠. 다시 말해 내가 친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혹여 그것이 나의 피해의식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쪽에서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을 만큼 그쪽에게도 내가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따져보니 그다지 유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던 겁니다. 판단컨데 친구는 나의 항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관계는 그 즉시 깨어질 만큼 신뢰와 유대는 약했으며 그저 내 입장에서만 더 아쉽고 구차한 사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 해도 관계를 쉽사리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만큼 여러 환경적, 상황적 이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친구가 내가 속해 있는 무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만약 그와의 관계를 포기했을 때 나의 위치는 덩달아 어떻게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나의 생활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하는 정치적인 고민 같은 것들 말입니다.

-보통의 존재, 이석원,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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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일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힘을 누구한텐지 내준 데 원인이 있는 거야.
-데미안,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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