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내린 나무

글읽기 2016. 6. 21. 01:43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작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고, 납득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면에 스며든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던 느낌... 자라던 줄기와 피어나던 색색의 꽃을 잊을 수 없다. 길을 거닐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상의 나무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가 키워 올린 나무였고 이미 뿌리를 내리고 선 나무였다.

 

 나는 여전했지만 여전하지 않았고, 예전과 달리 누가 누구와 헤어졌대, 누가 누구를 버랬대... 주변의 속삭임에도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에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은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명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그런 나무를 키워본 인간만이, 인생의 천문학적 손실과 이익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믿음엔 변함이 없다.

 

 변함없이

 

 현실에선 세일과 세일이 이어졌었다. 두어 차례의 반짝세일까지 겹쳐 다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느낌이었다. 날이 멀다 하고 일을 관두는 아이들이 속출했고, 때문에 지옥이라 불리던 지하 1층으로 지원을 나서는 일이 예사가 되었다. 정말 힘들군요. 힘들지. 어쩌다 마주친 요한과도 고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게 전부였다.

 

-157~158쪽,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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